을병연행록 문명의 길, 경계에 선 지식인[을병연행록]을병연행록 문명의 길, 경계에 선 지식인[을병연행록]저자 홍대용 해설가 박성순 동국대 강사문명의 길, 연행을 생각하면 희망은 본래 있는 것일 수는 없고, 없는 것일 수는 없다.그것은 지상의 길 같은 것이다.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다.걷는 사람이 많으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이다.근대 중국의 사상가인 혁명가인 루쉰의 소설”고향”의 마지막 구절은 공포 속에서 꽃 핀 희망 도에 대한 속담이다.마오쩌둥에 의해서”현대 중국의 최고 성인”으로 지지된 루쉰은 해변의 푸른 모래밭을 걷도록 희망의 길을 창조했다.그것은 주어지지 않은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야 할 역사 속에 터진 사람들의 소명인 것을 받아들인 결과다.그렇게 길은 역사를 창조하고 희망을 주조하다.그리고 우리는 중세 조선 곡 계곡을 건너 새로운 문명과 마주 보려고 한 사람들이 지나간 길을 렌교오라고 부른다.연기행이란 조선 시대에 나라의 사절로 중국을 방문한 일종의 외교적 업무를 가리키는 말이다.명대까지는 중국 황제에게 배알한다는 의미에서 아침 하늘과 했지만, 청대에는 베이징을 연경으로 부른 습관에서 연경으로 바꾸어 주체적인 외교관을 드러냈다.1644년 청나라의 수도가 베이징으로 옮겨져서 시작된 연행은 1876년에 조선이 개항할 때까지 무려 673회에 이른다.연행 사절은 주요 사신인 정사와 부사, 경찰서 장관 등을 중심으로 통역사, 압물관 등 관리와 그 수행원으로 구성되지만 한번 내왕하는 사절의 총 인원은 많을 때에는 500여명에 달했다.이 사절단이 서울을 떠난 베이징에 이르는 여름의 사절은 베이징의 북쪽 열 강까지 갔다.연행록(제비)은 연행에 참가한 여행자들이 남긴 기록이다.여행은 일상적인 세계에서 벗어나려는 희망이자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싶다는 충동도 있다.여행은 시대의 모순과 위기를 감지하고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의식을 각성시켜서 자아를 새롭게 한다.자신과 타인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올 측면에서 여행은 “사람의 모양”[인문]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는 사유 방식이기도 하다.연행된 조선의 선비들도 조선과 중국이라는 타자와의 거리를 헤아리는 공간을 재배치하려고 시도한다.그러나 여행이 빚어내는 다양한 심적 구조의 변화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이전의 연기 행록은 중국과의 동질감을 확인하는 데 대부분 바쳐졌다.중국과 조선을 둘러싼 세계를 보다 정확히 인식하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은 시도는 18세기 중반에야 발견되지만 그 최초의 페이지를 담당하던 홍·대용이 열었다고 해도 좋겠다.청의 수도의 깊이를 나타내는 지도이다(국립 중앙 도서관 소장).홍·대용(홍)『 을 병 노부 행록 』은 18세기에 한글로 쓴 드문 기행 문학이다 최장 편의 노브 유키 일기이다.장서 각본”을 병 연행록”은 장장 20권 20권 분량의 분량이다.약 2600쪽에 이르는 이 놀라운 기록은 보고 듣는 것들을 기록한 단순한 중국 견문기에 그치지 않는다.그것은 18세기 조선의 철학적·윤리적 기초를 다시 주조하려는 가장 독창적인 시도의 하나이다.또 문명의 길 위에 선 경계인의 기록이자 문명을 위한 도적인 사유의 모색이며 두꺼운 문화의 보고서다.3편의 연행록의 가족이 이를 찍는데 3년이나 걸렸다는 “을 병 연행록”은 한글 책 외에 한문 본과의 “연기”과 “회우록”이 따로 전한다.『 을 병 연행록 』은 여성 중심의 한글 독자층을 고려한 일기체가 되고 있다.『 재수 』은 인물, 고적, 문물, 노정 등의 주제별로 엮어 『 회우록 』은 베이징의 유리창(류리 창)에서 만난 항저우의 세 선비와의 친분을 기록한 것으로 『 마르동 필담( 마른 정衕 필담)』이라고도 불린다.이렇게 보면 『 을 병 연행록 』은 『 연기 』과 『 회우록 』을 하나로 묶은 것이면서도, 한문 책에서는 보지 못할 여행의 사실적 필치, 풍부한 화폭이 두드러진다.이 3편의 연행록에서 『 회우록 』에 찍어 쓴 박·지원의 서문은 동 아시아 문화 교류라는 측면에서 홍·대용의 중국 여행을 부각하고 사상사의 전환과 연계해서 설명하고 있어 주목된다.박·지원은 『 회우록 』을 읽고 난 다음 폰·대용의 친구를 사귀는 도리에 감탄하고 자신 또한 이제야 친구를 사귀는 도리를 알게 됐다고 고백했다.교제의 말이 “모든 지성과 불쌍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며”친구가 되는 곳도 봤고, 친구가 되는 곳도 봤고 자신이 친구가 되는 곳을 그는 친구로 삼지 않을 것도 본 “이란 말로 끝을 맺는다.그는 우리 나라가 좁은 데, 그래도 논란과 파벌이 4가지로 나뉘어 서로 친구 아니라며”왜 친구가 될 수 없는데 굳이 함께 길을 말할 수 있는가”라고 한탄했다.이 『 회우록 』은 박·지원뿐만 아니라 이·독 음, 박·제니퍼가 등 북학파에도 전해져연행하는 기회로 이어졌다.그들 중에서 이·덕무는 “감정을 격발하고 눈물을 흘리는 “편지와 필담(필담)을 요약하는 논평을 달고”천애 지기서”를 짰다.그 서문에 『 회우록 』을 “장엄한 말과 우스꽝스러운 말이 잇달아 나오기 때문에 참으로 기서(기서)입니다”만사”이란 이를 기록하고 무정한 자를 경계하는 자료이다.박·제니퍼가도 “문득 미친 듯 밥을 먹고 있어서도 숟가락을 사용하는 것을 잊고 세수를 하더라도 얼굴을 씻는 것을 잊을 정도였다”고 고백했다.이처럼 『 회우록 』은 그들의 찬탄과 동감의 안에서 북학의 길을 준비한다.『 회우록 』과 『고 천애 유키토 시서 』에 붙은 서문이 기이한 교우사를 앞세운 반면 『 을 병 연행록 』에는 서문과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다만, 글의 앞부분인 1765년 11월 2일의 일기에서 첫머리를 장식하는 시 한 수를 통해서 중국 여행에 대한 그의 동경과 기대를 짐작케 하기.진시황의 만리장성을 볼 수 없으므로 아이의 벼르고 있고, 우뚝을 저버렸다.미호(미호)하나의 전설에 물고기를 낚시 배가 적으니 혼자 도롱이를 입고 이 인생을 웃어라.이는 조선 중기의 학자 김·챠은효프이 연행하는 한 사람에 쓴 시이다.석실 서원 시절 스승인 미호·김 전행은 연행에 나온 홍·대용에게 이 시를 건넸다.홍·대용은 이 시에 이어”여름의 벌레와 함께 얼음을 말할 수 없다”라고 한 종이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조선이 비록” 작은 중화”라 불리는데 땅이 좁은 나라 안의 선비도 다시 좁은 곳을 편안하게 생각하는 원대한 의미가 없는 일을 걱정했다.그래서 그는 세상 밖의 큰 것을 보고천하의 큰 땅을 보고 싶어 매일 학문과 마음을 닦고, 한자어와 한음을 익힌 것이다.그래서 그는 장도에 오르기 전에 “만약 만족의 땅은 군자의 밟을 곳이 아니라 호주 복 인물은 함께 하지 않는다면 이는 편협한 소견이며 인자한 사람의 마음은 아니다”며 결연 키타학의 화제를 넓힐 수 있었을 것이다.경계에 선 지식인 홍·대용의 중국 여행이 정해진 것은 1765년의 한여름인 음력 6월이었다.삼촌의 폰·옥(홍억)이 동지사의 서장관이 되면 자제 군관으로 동행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군관은 무관을 가리키지만 자제 군관은 세사의 친척 중에서 임명하기도 했다.군관은 했지만 대부분의 문인 학자이고 행동이 자유롭고 중국인과 수시로 접촉하고 일행에서 떨어지고 산천을 유람하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제도와 풍속을 관찰했다.그 관심과 기호에 의해서 폭넓게 행해진 견문과 사유가 “연행록의 문화사”를 구축하게 된 배경이다.김·장 오프의 “노가 재연 행록”, 박·지원의 “렬하 일기”과 함께”을 병연 행록”은 대표적인 자제 군관 연행록에서 연행의 기록이 문화사와 지성사의 담론으로 그 지평을 넓힌 경우다.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몰두했던 홍·대용은 이전부터 기회를 보고가끔 중국어 공부까지 해서 주저 없이 연행 길에 올랐다.부모님이 또 평생의 고심이 있음을 알고 있기에 흔쾌히 승낙했다.1765년 음력 11월 27일 홍·대용은 35세로 압록강을 건너게 된다.깊은 겨울의 석양이 산에 올 때를 맞아 집을 떠나고 고국을 버리고 만리 연사(츠바메사)를 향한 마음이 왜 나쁜 안 되는지 수십년의 평생 소원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단지 학생으로서 군복을 입고 말을 몰고 이 땅에 이르렀으니, 상쾌한 의사와 강갠 마음으로 말 위에서 솜씨를 자랑하게 몰랐다.마침내 말 위에서 한곡 미친 노래를 읊었다.하늘이 사람을 팔려고 내놓는 곳이 있다.나 같은 키와 무 삶은 무엇을 이룬 것?···어젯밤 꿈을 꾸면 요동의 들판을 날고 건너 산 해관의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누른다.보카이 테이( 먼 혜정)의 1층에 취한 뒤 높은 앉아 칡 돌을 발로 차기”천하 제일문”이라는 현판이 내걸렸다.조선의 편협한 소견을 버리고 원대한 뜻을 넓히려는 홍·대용의 평생 소원은 1,200리의 요동 벌(벌)을 단숨에 날아가산하이관을 한 손으로 누르는 것으로 형상화된다.그것은 옛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였다 덩굴 돌산을 발로 차고 발해를 비우고 가슴에 채우는 장엄한 민족 서사 시에서 민생의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고 만리장성을 쌓던 진시황의 미친 뜻을 비웃는 역사 의식에서 구현될 것이다.이런 감격 속에서 압록강을 건너구년 성에 도착하던 홍·대용은 책문, 봉황 성 새 요동을 거쳐서 12월 8일 선양에 도착한다.또 초등 새까맣고 신콘, 사하, 산해관을 거쳐서 12월 27일 베이징에 도착, 이듬해 2월 29일까지 2개월간 베이징에 체류한 뒤 1766년 3월일 베이징을 떠나고 4월 27일 서울로 귀환한다.이저우부터 선양까지 580리, 선양에서 산해관까지 803리, 산해관에서 베이징까지 660리 등 왕복 4,100리 길의 대장정이었다.성당의 조선인 1765년 12월 27일 마침내 베이징을 방문하던 홍·대용은 28일 례부에 글자 글을 올리기 때문에 자금성에 들어간다.그에게 베이징의 번영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웠다.『 노가 다시 연행 일기 』을 통해서 수없이 접한 풍경이었지만 그는 눈이 부셔서 마음이 놀랐다고 고백한다.실로”귀로 듣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 같지 않아서 왜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홍·대용의 본격적인 북경 구경은 1766년 1월 9일 미나미 성당을 방문하면서 시작된다.그는 성당 안으로 들어서자 곧 벽에 걸린 10여명의 초상화 속에서 아담·쉘(Adam Schall)과 맛테오·리치(Matteo Ricci)의 화상을 가릴 수 있었다고 한다.그리고 당시 미나미 성당의 선교사였던 할레 슈타인(Augustin Von Hallerstein)과 고게이슬(Anton Gogeisl)을 만난다.그는 총 4회 성당을 방문했지만 그들의 만남은 오로지 필담(필담)만에서 열렸다.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천문학과 자연 과학에 대해서 묻는 그의 진지한 표정을 그 성당에서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20대 후반에 이미 천체 관측 기구인 혼천의(혼)와 함께 알람 시계를 만드는 것을 계획하고 30세를 막 넘긴 2대의 혼천의와 자명종 시계를 만들어 사설 천문대인 “농림 수산부 건물”을 고향의 미즈무라에 세운 그에게 성당은 문명화된 공간이었다.성당을 방문하기 위해서 서양 선교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홍·대용은 ” 사는 곳이 가난 벽에서 소견이 고르고, 하늘의 도수(도수)와 천문 기기의 구조와 양식을 정말 알수록의 재능이 아닌 것에 망연자실 스스로 헤아리지 않고 배우기를 바라는 뜻이 일생에 맺어진 “이라고 말했다.그래서 성당에서 망원경으로 태양을 관찰하고 난생 처음 보는 파이프 오르간의 구조를 보고연주하던 홍·대용의 감격이 어떠했는지는 짐작이 간다.이미 서양 과학 기술과 상수학과 우주론에 전문적 식견을 갖춘 홍·대용더라도 관상대에서 본 서양 과학 기기의 정묘함은 또 다른 충격이었다.후에 연행된 박·지원 역시 성당을 방문한 감격을 『 욜하 일기 』에서 술회 한다.성당의 바람 벽과 천장에 그려진 구름과 인물들은 “번개처럼 반짝이며 먼저 저의 눈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이라며”마치 숨을 쉬고 꿈틀거리게 음양의 향배가 서로 어우러지며 자연스럽게 밝고 어두운 곳을 보였다”이라고 말했다.홍·대용 이후에도 중국에 이르자 성당을 먼저 못 본 사람이 없지만”황홀하고 있어 오히려 괴물 같게만 알고 이를 배척했다”라고 하면 18세기의 문명을 이해하는 태도는 이렇게 달랐다.이처럼 폰·대용 베이징 여행은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기존의 이해에 구체성과 그 사상적 지평을 넓힐 것.그 풍부한 이유는 한국 문학사에서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인데, 박·지원의 『 욜하 일기 』도 홍·대용의 『 연기 』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취하고 있다.기부 사실, 서학이 조선에 유입된 시기는 1603년 맛테오, 리치의 “곤여 만국의 그림”이 소개된 17세기 초이다.『 하늘 주의 』은 유· 몬 인(유 꿈 호랑이)의 『 오야 댐(어우 야담)』이나 이·스그아은(이 晬광)『 지식 미네 유설(시바 미네 류說)』 등에 이미 소개됐지만 텐도오·지옥설 등으로 세상을 현혹한다는 비판을 받았다.그 뒤 서학은 18세기 실학 사상가들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탐구되고 수용하기 시작했다.그 중에서도 천문학과 지리학은 각별한 관심을 끌게 되지만 실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자연관과 윤리관의 혁신을 불러일으킨다.즉 천문과 지리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기존의 “천하”에 대한 관념을 수정시킨 것이다.이는 16세기 들어 소중화 의식, 다시 말하면 중화 문명의 동질성을 통한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한 인식의 청산을 요구하는 것이다.그리고 성당을 방문한 홍·대용과 박·지원은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서 그들의 이유를 승인할 수 있었다.훗날 4회 베이징을 방문한 박 제가는 그의 『 키타 학의 』에서 “니시사 초빙론”을 주장할 지경이니 홍 자세보다 18년 후의 1783년에 연행한 이승훈은 이듬해 베이징 시안 문 밖의 북쪽 성당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다.베이징의 유리창(류리 창), 1776압록강을 건너 2천리 길의 대장정에 오른 홍·대용의 바람은 ” 아름다운 수재(수재)이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서 그와 함께 마음껏 이야기를 하고 싶은 일”이었다.그의 소원은 기적처럼 이루어지지만 만나게 되는 이야기부터가 매우 극적이다.정사의 비장, 이 모토나리는 여행을 떠날 때 안경을 사오도록 부탁 받고 창문(류리 창)에 가고, 마침 안경을 낀 두 선비를 만난다.그들에게 팔도록 요청하자 한 사람이 안경을 벗어 주고 그 가격은 굳이 거절했다.이·기 손은 그들의 위치를 묻고 돌아온 폰·대용에 전달했고, 그것 없이 선비인 것이므로 보기를 바란다.이를 총그들의 우정이 신분 질서에 묶인 조선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이었던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연기 행록의 화폭에 화려하게 그려진 교유의 기록은 이제부터 시작이다.이 교제의 기록이야말로 조선 후기 실학의 시대를 꽃 피우는 자양이었다.교유를 바탕으로 한 연기 유키의 경험을 계승하고 축적하면서 조선의 실학은 새로운 학문의 방법을 받아들이고 그 학문적 면모를 갖추게 되고 새 시대를 이끄는 윤리와 철학을 준비하게 된다.의산로 길을 물『 을 병 노부 행록 』에서 보인 홍 자세의 지적 호기심은 학문론에서 역사, 주자학, 양명학, 시론, 화론, 천문학, 수학, 음악, 병법, 과거론, 인격론 등 백과 전서적인 편 폭을 갖는다.『 의산 문답 』에 이어지는 그의 학문적 넓이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다.홍·대용은 중국에서 우 레이 산을 중식과 만족의 경계로 봤지만 이는 즉 『 의산 문답 』의 배경으로 설정됐다.모토코와 실옹의 문답으로 구성된 『 의산 문답 』은 유학자인 모토코의 공소를 나타내는 역사, 우주 만물의 생성과 이치 등을 규명하다.『 의산 문답 』에서 홍·대용은 “하늘이 보면 사람도 물건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이를 인물 균으로 알려졌으나 이 이유는 사람과 사물을 상대적인 관계로 이해하는 인식론적 전환이다.여기서 더 홍·대용은 당대의 지배적인 사상이었다 북벌론이 타인을 지배하고 억압하려는 주체의 욕망이 극단화된 모습임을 간파한다.역외 춘추론으로 보인다”중국도 만족도 마찬가지”라는 크나크자세의 통찰은 문화적 상대주의에 대한 헌사나 다름없지 않는 셈이다.홍·대용의 중국 여행과 교우가 의미 있게 접근하는 것은 서로를 인생의 목적으로 취급하고, 책임 지는 교우의 자세를 확고히 유지했기 때문이다.여기에 근대를 넘는 새로운 윤리적 자질이 내포되어 있다.공동체의 규범과 습속을 훨씬 넘어 자발적인 진정한 대화와 타인에 대한 책임을 기초로 하는 교우론의 윤리도 동 아시아 연대와 자유로운 주체를 확립할 가능성이다.남산 자락에 위치한 홍·대용의 집은 “유·츄은오(유급 춘오)”, 즉”봄이 멈춰서서 언덕”로 불렸다.시대를 잃은 불우한 가쿠토들이 모여서 음악과 학문과 마음을 나눈 그곳에서 홍·대용은 “평상복 차림에 흰 모자를 쓰고 향산 누각 속에 한가로이 앉아 『 회우록 』를 마음대로 뒤로 물러나”이라며”그 손때를 만져”라고 말했다고 한다.마치 주술에 걸린 듯 소환된 교우의 기억은 일상을 규정하는 낡은 규범을 새로운 변화시키는 한편 실학의 완전한 방도를 구현하지 못한 시대와의 불화를 가슴을 치게 환기시킨다.아름다운 향기를 가슴에 품고 죽은, 선의 초상화 때문일까?천하의 큰 땅을 보고세상의 큰 도리를 가슴에 안고도 그 뜻을 펴지 못하고 살아온 홍·대용의 고독으로 감염한 때문일까.붉게 물든 새벽.거문고 소리에 실린 한조각의 노래가 희미하게 그려지는 것이다.높은 사람은 깨끗한 지조를 가지고/숲속의 집에서 굳은 뜻은 변하지 않네.혼자 그라파의 거문고를 타면/ 맑은 소리가 공중에 가득하구나.다만 먼 생각을 붙이려는 것이 아니라 깊은 걱정을 스스로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그리운 사람들이 멀어서 만날 수 없으니/낭비 없이 저장·항저우의 서신만 만지는 거야.따뜻하고 따뜻한 엄·성은/평소의 마음은 단아하에서 소탕하고 성질이 비범한 유 목은 노부(제비)국가·오(오)나라에 명예를 휘두르고 글 잘하는 밴·죠은규은는/그 성품이 찬연히하고 있다.하늘가에 지기를 맺자/ 살아 죽음에 슬픈 슬픔 많았다?천한 제가 옆에서 듣고 한탄하며/너의 외로움을 달래어.동쪽의 선비가 있고 높아서/그냥 내가 나를 벗삼뿐이네.-나·독도 음,”홍·댐 폰(홍 징 처마)데( 대자세)의 원정(라 쿠테이)”에서 더 생각할 문제 1.홍·대용은 일찍부터 과거를 포기하고 실학에 전념하면서 중국 여행을 도모하고, 박·지원도 마찬가지였다.중국에서 탄생하면서 한국과 베트남에 전파됐고 천년 이상 지속된 과거는 동 아시아 정치, 사회, 교육, 학술, 문학 등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친 큰 영향을 미친 인재 선발 제도이다.그런 과거가 중세 후기에 접어들었으며, 박 말 세상의 『 요로원 야화기 』와 오·교은지에의 『 유림 외사 』에 보듯 동 아시아의 중요한 사회 문제로 대두했다.홍·대용은 청나라의 선비,·송의 과거 락방을 축하하기까지 했으나 홍·대용이 과거를 포기하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2.홍·대용은 중국의 경험을 한글판 『 을 병 노부 행록 』으로 남겼다.이는 국문으로 표기된 우리 가요인 『대 둥펑 풍요 』을 그가 뜨개질이라는 점과 함께 민족 문학사적 가치를 지닌다.이는 박·제니퍼가가 『 키타 학의 』에서 중국어 사용을 주장한 것이나 박·지원의 한글 문학 작품이 발견되지 않은 점에 비추어 매우 특이하다.홍·대용의 『 을 병 노부 행록 』이 가진 민족주의적인 속성으로 보편 주의적 견해는 어떻게 양립하는가?3. 홍·대용은 중국 여행을 통해서 청나라의 문물과 서학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된다.또, 성, 방·죠은규은, 유 해고 등과 토론을 통해서 조선에서는 이단시됐던 양명학과 불교에도 관심을 기울이다.그의 실학이 북학파를 통해서 구체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 정치와 삶의 현장에서 실현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추천의 텍스트 『 산해관 닫힌 문을 한 손으로 누르-홍·대용의 을 병 연행록 』, 홍·대용 저 김·사진·박·송승 번역, 돌 베개, 2001. 『 을 병 연행록 주해』, 홍·대용 저 서울·재용·쵸규익, 장·교은남, 최· 인 팬 주해, 태학사,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