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 이창훈 근황 + 맹구 프로필 나이 결혼 가족 동생 배우 이미영 이혼 전영록 전와이프

1992년 2월 3일 KBS2 웃음으로 ‘봉승아학당’에 맹구 이창훈 이미영 남매가 동반 출연한 바 있다 https://youtu.be/E9Xm33WUKPY

개그맨 이창훈 근황 + 맹구 프로필 나이 결혼 가족 동생 배우 이미영 이혼 정영록 정와이프

본명 이봉남 출생 1955년 2월 19일 (67세)

본명 이봉남 출생 1955년 2월 19일 (67세)

가족의 여동생 이미영(1961년)

1955년에 서울에서 태어났고 젊은 시절에 서라벌 고등 학교를 졸업하고 서라벌 예술 대학 연극 영화학과 중퇴 후 1975년 극단”창조”에 입단했고 연극 배우로서 입문했다. 이후 극단”76″,”마당”,”민중 극단”,”광장”등을 전전하며 천의 얼굴과 멋진 목소리로 관객을 사로잡은 1986년 서울 연극 연출가 그룹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했다. 최·양 라쿠가 대학로에서 관객 모독 한국 초연에 출연한 이·장흥의 연기를 보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초대 관객 모독 같은 작품은 연극계에 전설의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그래서 최·양료크이 당시 유머번 땅, 한바탕 웃음으로 등을 연출했던 수많은 코미디언을 배출시킨 김·은 레 PD에 이·장흥을 추천했다. 김·은 레 PD역시 이·장흥의 연기를 보고(“우리 가족은 아무도 못 말리는 “이란 작품) 큰 감명을 받고 대학로 극장 앞 커피숍에서 매일같이 이·장흥과 만나고”텔레비전에 출연만 하면 당신은 반드시 스타가 될 텔레비전 출연만 승낙하면 주위의 연극인들도 텔레비전에 출연시키고 인기를 모아주세요”등의 말을 전하며 이·장흥을 설득했다고 한다.

결국 이·장흥은 당시 경제 사정도 여의치 않아, 무엇보다 자신만이 아니라 동료 연극인들도 함께 출연하고 띄워서 주겠다는 말에 방송 출연을 승낙하고 브라운관 데뷔한다. 이때 최·양 라쿠가 그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즉시 이·장흥을 자기 집으로 데려와서 코미디를 가르쳤다고 한다. 물론 최·양 라쿠가 이·장흥보다 훨씬 젊어 이·장흥은 최·양 락이 개그를 하기 전부터 계속 연극을 하던 사람이었고 연극에서 재미 있는 역할도 자주 하고 있었다니, 개그를 가르쳤다는보다 텔레비전 방송에 맞는 개그 연기를 가르쳤다고 봐야 한다.또 연극 분위기와 방송에서 사용 대사 톤이 다르기 때문에 방송에 맞게 강약 조절을 하고 준 것으로 보인다. 같은 연기에 분류되지만 텔레비전에서 하는 연기와 무대에서 하는 연기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무대 연기는 조명과 동선의 관련성에 초점을 맞추는데, 방송 연기는 카메라가 동선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 관객이 있는 공연 계열의 방송 개그 콩트를 추진하더라도 관객보다 카메라 워크를 고려하고 마지막으로 재미 있는 감정 선이 크게 살아나게 짜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 이·장흥의 입장에서 성공한 방송 개그맨에 배우는 것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연극에 종사했으나 브라운관에 데뷔한 연극 특유의 과장된 톤과 발성을 고치지 않고 곤궁하는 경우가 꽤 많은데 대표적으로 데뷔 초기의 송·동일이 있다. 좀 과장하면 영구의 심·효은레과 함께 한국 코미디 계의 “맹구”라는 전설의 캐릭터를 이끌어 낸 당사자 답지 이후 1990년대의 가장 유명한 개그맨으로서 활동했지만 1999년 어머니의 병 간호를 이유로 모든 방송 활동을 완전히 중단한다. 실질적으로는 2001년에 방송된 KBS월화 드라마”미나”에 출연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2005년에 본업이었다 연극 무대에서 현재는 연극 무대만 활동을 하고 있다.

2005년 『 스타 뉴스 』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서 보니 텔레비전이나 개그맨으로서의 삶으로 인기를 끌면서 나름대로 부를 축적했지만 그것으로 자신의 가려던 진로에 대한 고민과 이미지의 타격에 의한 고통이 큰 듯, 코미디라는 장르에 대해서는 완전히 인연을 끊고 살아 있다.먼저 나온 대로 본인이 코미디언의 길을 선택한 결정적 이유에서 동료 연극인들도 함께 출연하고 인지도를 높이겠다고 한 어른들의 말을 믿고 코미디의 길에 들어섰지만 정작 본인만이 기세를 몰아 연극계는 여전히 침체기에 있는 부조리에 시달린 것으로 보인다.그런데 연극과 방송은 분명히 체계와 방식이 완전히 달라서 방송국에서 출연시키고 싶어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방송은 적절히 애드리브도 치고 방송 작가들과 PD들이 그때마다 즉흥적으로 만들어 편집하고 만들어 가지만 대본과 동선이 절대로 어긋나서는 안 된다 연극과는 아무래도 너무 다르다. 이·장흥처럼 개인의 역량이 크지 않는 이상, 연극 배우들이 방송에 쉽게 적응하기 어렵다.

KBS코미디 40주년 특집 때도 임·하료은, 최·양 락시미, 이·동봉 원화 등 원로 코미디언이 출연했지만 이·장흥은 등장하지 않아 맹구 역은 김·준호가 맡았다.그래도 이·장흥 자신은 맹구라는 캐릭터가 준 바보 캐릭터와 캐릭터성에 대해서는 항상 긍정적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연극 배우의 삶이 지금도 아르바이트와 병행하면서 하는 사람이 많지만 당시는 더 심해서 배가 고팠다. 그런 면에서 방송, 행사, CM, 밤의 무대 등으로 부를 축적하고 자신의 인생을 바꾼 캐릭터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동생 이, 미영이 2020년 1월 11일 SBS Plus<김·수미의 밥은 먹고 있는가>에 출연하며 근황을 전했지만 지금은 연예계에서 은퇴해서 비 연예인의 삶을 살고 있다는.

KBS 코미디 40주년 특집 때도 임하룡, 최양락, 이봉원 등 원로 코미디언들이 출연했지만 이창훈은 등장하지 않았고 맹구 역은 김준호가 맡았다.그럼에도 이창훈 자신은 맹구라는 캐릭터가 준 바보 캐릭터라는 캐릭터성에 대해서는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연극배우의 삶이 지금도 아르바이트와 병행하면서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당시에는 더 심해서 배가 고팠다. 그런 면에서 방송, 행사, CF, 밤무대 등에서 부를 축적하며 자신의 인생을 바꾼 캐릭터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동생 이미영이 2020년 1월 11일자 SBS Plus <김수미의 밥은 먹고 다니냐>에 출연하며 근황을 전했지만, 지금은 연예계에서 은퇴하고 비연예인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이·장흥은 1990년 3월 KBS2코미디 하이웨이 코너”행복 주식 회사”로 방송 데뷔를 했다. 1980년대에 KBS에서 방송된 옛 사랑, 아쉽게 헤어진 사랑을 찾는 업체를 배경으로 한 코미디 드라마이지만 원래는 단막극이었으나 그가 출연하고 미니 시리즈 격으로 늘어났다.참고로 이 코너는 “사랑을 찾아 줍니다”(원제는 Finder of Lost Loves에서 1984~85년까지 ABC를 통해서 방송됐다. 시즌 1, 모두 23이야기로 끝나고 별로 인기는 없었지만)이라는 제목의 미국 드라마 설정과 주요 이야기를 그대로 카피해서 만든 것이다. 또 원작이 1987년 6월 19일부터 밤 10시 40분에 KBS1심야 드라마의 더빙 방송되고 1988년 3월 12일부터 8월 13일까지는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 20분에 KBS2특별 재방송 드라마로 재방송되면서 불과 2년이 지났을 뿐, 원작을 기억하고 있던 사람도 꽤 있었다.이후 1990년 7월, 유머가 제일지”맨손의 청춘”코너에서 목욕탕 목욕 관리사”이달용”이라는 팔분의 캐릭터로 출연한다. 달용의 캐릭터는 바보 캐릭터이면서 색다른 면이 있어서 갑자기 유식한 것을 그럴듯한 타이밍에서 말하기도 한다.여기서 저는 자장면이 정말 싫어. “나는 짬뽕, 나는 죽어도/목에 칼이 들어와서도 리바이벌되지 않아”이란 유행어와 어리석은 일을 한 뒤 상대가 보통 이마를 박은 타이밍에 손가락을 친 뒤 양손의 손바닥으로 관자 놀이를 하는 유행 동작으로 인기를 얻는다. 한가지 더하면 가수 민·혜경의 “크아은파도리”컨셉도 있었다. 사비 부분을 이상하게 노래하면서 빠진다는 느낌. 초대형 민·혜경 브로마이드를 가지고 있는데, 가게 광고용 브로마이드를 몰래 뜯어 걸려서 죽도록 때릴 뻔했다고…이 코너에서 이·장흥은 일약 스타 개그맨이 되고 1990년 KBS연예 대상 코미디 신인상을 수상한다.

1991년 5월 20일부터 웃음의 “봉승아 학당”코너에서 “이·맹구”라는 캐릭터로 출연, 큰 인기를 끌면서 이·장흥은 대한민국의 코미디 계의 역사에 하나의 방점을 찍다. 이미지 관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거친 표정 연기와 유연하면서도 여기저기에 뒤틀리는 몸을 활용한 몸을 사용한 개그 동작 하나하나에 눈을 뗄 수 없는 철저한 바보는 심 토오루부터 영구마저도 압도할 정도다.주특기는 몸을 친 농담과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엉망으로 전달하는 것, 그리고 두 손으로 가면을 본뜬 모양을 만들어 외치는 배트맨이었다. 배트맨은 선생님의 질문에 맥락 없다”배트맨~”을 외치는 것이다. 해당 코너에 배트맨이 등장했을 때는 1991년 6월 10일 방영 분이지만”베토벤을 아는 사람”을 찾던 선생님(김·김형곤 분)에 맹구가 운명 교향곡이나 “배”의 글자로 시작되는 데 언급하고 있었는데, 갑자기”배트맨~”과 반전 개그를 날린 것이었다. 이것이 호응이 좋아지면 다음 방송에도 계속 쓰게 됐지만 일부 편은 몸에 충격을 받으면 배트맨을 외치게 된다는 설정에 변함도 했다. 한국에서 당시 영화”배트맨”은 마침 봉승아 학당이 시작된 1년 전에 공개됐지만 사실상 한국에서 슈퍼맨보다 늦게 공개된 배트맨을 슈퍼맨과 동급 인기로 한 것은 맹구다.또 선생님 역의 개그맨이 ” 답하고 볼 사람?” 하면 학생들이 서로 손을 들어 답례를 하려고 하지만 맹구가 “네네”라고 하면서 난리고 결국 답변권을 얻기가 히트했다. 당시 학교 너무 흉내내고 수업에 지장이 나올 정도다. 당시 SBS에 많은 선배들이 이적한 가운데 KBS의 자부심을 지킨 공적이 컸다.맹구의 캐릭터와 유행어 한발 기예가 한번에 다 나오는 추출물 영상이다. 웃음의 보장(5분 40초에서 9분 10초까지)https://youtu.be/tBGWiQd7Tgk

그러나 이렇게 인기를 누렸던 1992년 6월 10일 이·장흥은 2달 전부터 서울 청담동에 무허가 술장”풀보”을 만들어 접대부 10여명을 데리고 불법 심야 영업을 했다는 이유로 수배를 받는 경찰에 구속됐다. 결국 7월 28일 징역 10월 및 집행 유예 2년을 선고 받고 풀려났다. 자숙 기간 중 구속 전에 계약을 맺은 어린이용 영화를 촬영했다. 이후 연극계에 돌아오실 생각했지만, 아이 팬들의 복귀 요청이 대단했다 정도로 톱 클래스의 인기를 얻고 당연히 주변으로 막을 수, 결국 신인의 마음가짐으로 맹구 역에 돌아온다.그가 구속되기 전인 6월 8일 방송분에서는 동료의 하쿠동이 ” 아파서 참석하지 않았다”라고 한 하쿠 단의 말로 수업 끝까지 맹구는 나오지 않았고, 15일 방송분에서 “결석”언급조차 없었다. 6월 8일 녹화를 앞둔 이달 4일”갑자기 일이 생겨서 방송국에 나오는 입장이 아니다”로 구속 전까지 행방을 감추고 말았다.[6]구속 이후 봉승아 학당은 잠시 오소발 독주 체제 들어”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맹구가 귀환하다가 머리를 부딪치고. 바보가 된다”는 설정으로 다시 복귀했다.이 사건으로 비난을 받고 공백기도 보냈지만 도저히 멈출 수 없는 인기 때문에 1992년 KBS코미디 대상을 수상하게 된다. 1993년 11월 8일을 마지막으로 봉승아 학당이 막을 내리고 멩그이·장흥과 오소발오·지에미은 희극실에서 공로패를 받았다.초대 봉승아 학당에서 정말 끝낸 뒤 그동안 소리였다 하회 탈 남·히속이 제2대 맹구적인 역할을 맡았으나, 이·장흥에 쫓아가지 못하고 잊혀지고 잠시 후 2대 봉승아 학당은 불명예 종영됐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심·현섭이 개그 콘서트에서 봉승아 학당을 재현하고 제3대 맹구(=심·맹구)가 됐지만 도저히 이·장흥의 오리지널에 따라가지 않았다.그래도 심·현섭의 경우는 이미”사바나 추장 개그”에서 히트한 직후에 하던 역할에서 충분히 인기가 있고 코믹 바보 연기의 거성 이·장흥의 “호감형 바보 스타일”대신 심·현섭 스타일의 ” 잘하는 바보 스타일”맹구를 재탄생시켰다는 평가도 받고 나름대로 오래 버틴 편이다. 무엇보다 “원조”맹구 본인이 가장 가깝다고 인정했다.한편李·장흥은 1990년부터 달용와 맹구 캐릭터로 아동 영화나 비디오 영화에도 자주 출연했지만 이 아이 영화는 지금 보면 표절과 머드 비디오에 가까운 섬 마인 작품이다. 첫 아이 영화 출연작, 짬뽕의 폰·길동을 비롯한 “맹구와 호쿠토 신검(극장 영화)”나 “맹구 크레용 신짱 스트리트 파이어(비디오 영화)”나···. 아동 영화 배우가 이·장흥을 주로 기용한 것은 왕 다리이다. 남·기 남이 영구를 사용하는 것만이 나는 맹구를 전면에 내다. 드래곤 볼의 어린 오공의 머리를 재현한(…)당시 아역 배우호·송 손처럼 왕 용 영화에 자주 오르는 정도는 아니지만 왕 다리의 피루모그라피을 감안하면 명예 왕 용 사단 수준에서 이·장흥을 굴릴 것으로 나타났다.전성기의 코미디상 시상식 등으로 분장하지 않던 이·장흥의 모습을 보면 의외로 고전적인 미남상에 목소리도 성우도 저쪽 간다고 할 만큼 묵직한 톤으로, 바보 연기 정도로 진지한 역할도 어울린 사람이다. 그러나 달용와 맹구의 캐릭터가 너무 강렬하며, 이후에 그가 잡는 연기, 특히 진지한 역의 역을 맡을 때마다 ” 어울리지 않는 “는 혹평을 듣게 되었고, 방송으로 자리를 점점 잃어 간다.그러다가 결국 자신이 만들어 낸 맹구는 캐릭터의 후광을 극복하지 못한 채 방송 활동을 그만두어 버린다. 특정 캐릭터가 초대형 히트하고 그 후광이 후에 배우/가수 경력에 악영향을 주는 사례는 많이 있지만<드라큘라>벨라·루고시,<슈퍼맨>의 조지·리ー우스,< 즐거운 장난 꾸러기>의 다나·플루토,<야·콤레야>의 “마·영달”로 유명한 이·쑉 등이 있다.위에서 말한 싯피ー의 이·장흥은 본래의 방송보다는 무대 공연, 즉 연극에 애착이 큰 사람이라 정규 드라마 연기에 대한 갈망이 너무 커서, 맹구를 그만둔 이유도 정규 드라마 연기와 췌장암에 걸린 노모의 병 간호 때문이었다고 한다. 방송 활동을 중단한 뒤에는 많은 연극 무대에 참가하고, 노모가 병에 걸리고 누우면 모든 사회 활동을 포기하고 산을 돌아다니며 약초를 캐고 어머니에게 바쳤다고 한다.https://youtu.be/Hj3Uw5GffV8그러나 이렇게 인기를 얻던 1992년 6월 10일 이창훈은 두 달 전부터 서울 청담동에 무허가 술집 ‘풀보’를 차려 접대부 10여 명을 데리고 불법 심야영업을 했다는 이유로 수배를 받아 경찰에 구속됐다. 결국 7월 28일 징역 10월 및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자숙 기간 중 구속 전에 계약을 맺은 어린이 영화를 촬영했다. 이후 연극계로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어린이 팬들의 복귀 요청이 대단했을 정도로 정상급의 인기를 얻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주변에서 말렸고 결국 신인의 마음가짐으로 맹구 역으로 돌아오게 된다.그가 구속되기 전인 6월 8일 방송분에서는 동료 학동이 “아파서 참석하지 못했다”는 한 학동의 말로 수업 끝까지 맹구는 나오지 않았고, 15일 방송분에서도 ‘결석’ 언급조차 없었다. 오는 6월 8일자 녹화를 앞둔 같은 달 4일 “갑자기 일이 생겨 방송국에 나갈 처지가 아니다”며 구속 전까지 잠적해 버렸다.[6] 구속 후 봉승아학당은 잠시 오서방 독주체제에 들어가 정신을 차린 맹구가 귀환하다가 머리를 부딪히고. 바보가 된다는 설정으로 다시 복귀했다.이 사건으로 비난을 받고 공백기도 보냈지만 도저히 멈출 수 없는 인기 때문에 1992년 KBS 코미디 대상을 수상하게 된다. 1993년 11월 8일을 끝으로 봉승아학당이 막을 내렸고 맹구 이창훈과 오서방 오재미는 희극실에서 공로패를 받았다.초대 봉승아학당에서 정말 마무리된 후 그동안 증리였던 하회탈 남희석이 2대 맹구적인 역할을 맡았으나 이창훈을 따라가지 못하고 잊혀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2대 봉승아학당은 불명예 종영되었다.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심형섭이 개그콘서트에서 봉승아학당을 재현하며 제3대 맹구(=심맹구)가 됐지만 도저히 이창훈의 오리지널을 따라갈 수 없었다.그럼에도 심형섭의 경우는 이미 ‘사바나 추장 개그’로 히트한 직후 한 역할로 충분히 인기가 있었고, 코믹 바보 연기의 거성 이창훈의 ‘호감형 바보 스타일’ 대신 심형섭 스타일의 ‘잘나가는 바보 스타일’ 맹구를 재탄생시켰다는 평가도 받으며 나름 오래 버틴 편이다. 무엇보다 원조 맹구 본인이 가장 가깝다고 인정했다.한편 이창훈은 1990년부터 달영이나 맹구 캐릭터로 어린이 영화나 비디오 영화에도 자주 출연했는데, 이 어린이 영화는 지금 보면 표절이나 매드 비디오에 가까운 썸마이한 작품이다. 첫 어린이 영화 출연작 짬뽕의 홍길동을 비롯해 맹구와 북두신검(극장영화)이라든가 맹구 짱구 스트리트파이어(비디오영화)라든가. 어린이 영화배우로 이창훈을 주로 기용한 것은 왕룽이다. 남기남이 영구를 쓰는 만큼 나는 맹구를 앞세운다. 드래곤볼의 어린 오공의 머리를 재현한 (…) 당시 아역배우 허성태처럼 왕룽 영화에 자주 나올 정도는 아니지만 왕룽의 필모그래피를 감안하면 명예 왕룽 사단 수준에서 이창훈을 굴렸음을 알 수 있다.전성기 코미디상 시상식 등에서 분장하지 않은 이창훈의 모습을 보면 의외로 고전적인 미남상에 목소리도 성우도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중후한 톤으로 바보 연기만큼 진지한 역할도 어울리는 희극인이다. 하지만 달영과 맹구 캐릭터가 워낙 강렬해 이후 그가 잡는 역할, 특히 진지한 역할을 맡을 때마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혹평을 듣게 되면서 방송에서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간다.그러다 결국 자신이 만들어낸 맹구라는 캐릭터의 후광을 극복하지 못한 채 방송 활동을 접고 만다. 특정 캐릭터가 초대박을 내고 그 후광이 나중에 배우/가수 경력에 악영향을 주는 사례는 많이 있는데, <드라큘라>의 벨라 루고시, <슈퍼맨>의 조지 리브스, <신나는 개구쟁이>의 다나 플루토, <야 콤레야>의 <마영달>로 유명한 이성은 등이 있다.위에서 말한 시피 이창훈은 원래 방송보다는 무대 공연, 즉 연극에 애착이 큰 사람이기 때문에 정극 연기에 대한 갈망이 매우 컸고 맹구를 그만둔 이유도 정극 연기와 췌장암에 걸린 노모의 간병 때문이었다고 한다. 방송 활동을 중단한 후에는 많은 연극 무대에 참여해 왔으며, 노모가 병에 걸려 눕자 모든 사회 활동을 포기하고 산을 돌아다니며 약초를 캐 어머니에게 바쳤다고 한다.https://youtu.be/Hj3Uw5GffV8거의 10년 가까이 맹구의 탓으로 고생했지만 본인도 맹구가 여기까지 길어질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실제 공수 부대 예비역 중령 출신인 이·장흥은 동작구에 하사 계급에 녹색 견장을 달고 신임 분대장으로 출연했다. 김 정식(김·종식)병장의 후임 분대장인, 중사 김진호의 소대장의 부하. 그런데 여기서 아주 착실한 사람으로 나오자 괴리감을 느낀 시청자가 매우 많았다.위의 사진을 봐도 아는데, 맹구의 분장을 하지 않은 인간의 이·창훈 씨는 지금의 이미지를 봐도 따뜻한 중년 미노년의 인상에 목소리도 꽤 남자 다운 중저음 톤에 점잖은 어조를 하고 있다. 이 역은 각각 개성적인 전 내무반 대원들에 비해서 혼자서 너무 정상이며 오히려 이상한 역할이었다. 덕분에, 에피소드 후반부로 갈수록 분대장의 이·하사의 말투가 맹구처럼 무뎌지는 것이 보인다.그 밖에 KBS어린이 드라마”누룽지 선생님”과 “감자 7개”에도 출연한 적도 있다 코미디”하이웨이”에서는 암행한 사역과 신혼 부부 역할을 맡았다는 것도 있다. 1996년 12월 7일 SBS의 ” 웃고 살아요 “에 출연했다. 그러나 모두 현명한 달료은(…)에 괴리감을 느낀 시청자에게는 역시 혹평 일색이었다. 결국”웃음은 행복을 태우고”이나 “고전 해학 극장”등에서 맹구와 비슷한 특징을 가진 캐릭터를 연기했다.후에는 이러한 이미지를 역이용하고”하버드”라는 학생용 책상과 의자 광고까지 등장할 정도. 너무 건강한 이·창훈 씨가 상품 소개를 한다. 그리고 아이의 소리(성우)에서 “에이~분위기 너무 만들~!” 하면 특유의 맹구 표정으로 “하버드라”와 광고를 끝내지만 표정은 틀림없이 맹구인데 목소리는 여전히 건강한 이·장흥의 목소리인 것이 압권.당시 CM집 방송 생활 만년에 KBS에서 방송한 코미디 특집 기획”도망자”에서도 매우 진지한 역할을 했다. 이 작품은 동명의 1963년 작 미국 드라마인가 2010년작 드라마 『 도망자 Plan』.B와 무관한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1969년 김 죠은레 원작 만화를 영상화한 작품이다. 의원의 윤·태호(이창훈)이 억울한 살인 누명을 쓰고 포도 대장(김정식)에 쫓기는 반면 유일한 사건의 단서인 나무 점 여성을 찾아 그것이 쫓고 쫓기는 한국형 스릴러였다. 원작 만화는 2003년 애장판로도 출판되고 있다. 이 작품의 분위기 자체가 코미디라면 무척 어둡고 진지하긴. 밥의 김매기로 유명했던 김·종식을 비롯한 개그맨들의 정규 드라마 연기가 돋보였던 작품 2004년경부터 이미 금연 상태였지만 2009년 폐 암 수술 후 2014년경 완치 판정을 받는 암을 극복하고 연극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병상에서 일어난 직후에는 김·들 양·동궁 주연의 영화 그랑프리에도 우정 출연하기도 했지만, 맹구의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니다 자칭”경마 전문가”로 말만의 개그 캐릭터로 나왔다. 얼굴을 보고”네?맹구?”라고 고개를 갸우뚱하던 관객들이 스탭 롤에 오르는 것을 보고역시!!! 했다니..배우 이미영이 이창훈의 여동생이지만 전영록과 결혼해 이혼했다. 이창훈은 그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인 정보람, 정우람 등의 외삼촌이 된다.1992년 2월 3일 KBS2 웃음으로 ‘봉승아학당’에 맹구 이창훈 이미영 남매가 동반 출연한 바 있다 https://youtu.be/E9Xm33WUKPY1992년 2월 3일 KBS2 웃음으로 ‘봉승아학당’에 맹구 이창훈 이미영 남매가 동반 출연한 바 있다 https://youtu.be/E9Xm33WUK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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